화계사 국제선원 동안거 수행기
-잠깐 앉은 동안 내 안의 영원성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의 안거를 예정하고 갔는데, 3주가 되어 버렸다.
일주일 안거가 끝나던 날 해질 무렵, 입승 스님1)인 리투아니아 출신 보행 스님께 "저는 저녁 예불 끝나고 갑니다."라고 영어로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시고, "그 동안 수행도 게을리 하고, 깨닫지도 못하였으니, 안거 끝날 때까지 더 공부하십시오." 하셨다. 사실, 하산 예정일이 되어도 산을 내려갈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차였다...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말만 그리하였던 것을 입승 스님이 알아차리셨던 것일까?...
어쨌든 그리하여 나는 총 3주 동안 꿈 속 같이 행복하고 평안하고 고요한 날들을 보내었다.
아, 부족한 것 투성이인 내게 어찌 그리 큰 복이 주어졌던가?
총 22일 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행하였던가?
우리의 수행 일과는 스님들의 일과표에 맞춰 똑같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출가, 재가자가 함께 수행하는 일은 우리나라 사찰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인데, 선원장이신 현각스님 이하 승가가 열린 마음으로 우리 재가불자를 받아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새벽 3시에 도량석이 울리고 나서 밤 9시 소등까지 하루는 꽉 짜여 져 있었다. 9시간여의 참선, 한국어 영어 섞어 진행되는 조석 예불, 108배, 울력2), 공양…
참선 대중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미국, 캐나다, 러시아, 라트비아, 이스라엘, 한국 재가자들... 스님들도 미국 분, 리투아니아 분, 러시아 분, 폴란드 분, 헝가리 분, 한국 분 등으로 다양했다(후반 며칠간에는 네팔 스님 일행도 다녀가셨다). 그런가 하면, 대중들의 안거 기간도 제 각각이어서, 최대 90일 안거하는 분부터 몇 주, 심지어는 며칠간 머무른 분들도 있었다.
하루 9시간 참선!
그 전에, 일요일 국제선원에서는 법문 시간 전에 90분 씩 앉았었다. 집에서는 하루 1시간 앉으면 잘 앉는 것이었고, 가끔 예외적으로 집이나 가까운 절에서 몇 시간씩 앉아보긴 하였었다.
하지만 하루 9시간 앉는 것은 참선 군대(?)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현각 스님도 언젠가 일요 법문 시간에 "여기 선방에는 22명의 (참선) 병사가 매일매일 하루 종일 정진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셨다.
내게는 하루 9시간 앉는 것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나, 한 번에 1시간씩 호흡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꼿꼿이 앉아있는 것이 힘들었다...
헌데, 선방에는 재가 불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번 생은 없다고 치고 출가하여 치열하게 수행하고 계시는 스님들이 계셨다. 내가 그분들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는 못 할망정, 혹여 라도 방해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다리가 저려와서 1시간 내내 꼼짝 않고 앉아있지 못하는 나는 번번이 40분쯤 되면 모든 도반들에게 죄송하다는 의미의 합장을 한 번 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참선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리 저린 것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2번 째 주에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새벽 참선 중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어느 순간, 코가 뻥 뚫리면서 기쁜 마음, 행복한 마음, 우주 전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밀려 올라왔다...
내 몸뿐 아니라, 주위에도 밝은 기운, 따뜻한 기운, 맑은 기운이 가득하였다. 그러면서 몸이 가볍다는 느낌을 넘어서 아예 한 조각 깃털(?)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뚜렷해 졌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아! 이것이었던가?
참선 스승님들이 참선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배 한 조각 베어서 입 속에 넣어 보라." 하시던 것이? 즉, 참선은 말이나 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체험해 봐야 한다던 것이?
그날 새벽, 참선이 끝나고 선방을 나와 밖을 바라보니, 나무들, 하늘, 산, 사람 모두가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선명하였다. '지금 이대로'가 최고로 멋진 세상이었다. 정말 신기로운 경험이었다. 그런 상태는 며칠 계속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주가 동안거 마지막 주라, 도반들은 다른 절로 성지 순례를 떠나기도 하고, 또 그 후 이틀간은 조계종 전全 사찰 차원의 도량 청소 일정이 잡히는 등 참선의 기회는 많이 줄어들어, 며칠 간 계속 되었던 참선 시의 특별한 느낌은 안타깝게도 다시 맛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이라도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는 것이 나를 진정 행복하게 해 주었다...
이 경험이 동안거 기간 중 최고봉의 시간들이긴 하였지만, 그에 못지않은 순간들이 넘치도록 많이 있었다.
이를 테면, 현각 스님과의 공안 인터뷰가 그 중 하나다. 내가 안거를 시작한지 사, 나흘 되던 날 아침. 입승 스님이 오늘 선원장 스님과의 공안 인터뷰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화계사 다닌 지 6년 가까이 되고, 현각스님이 선원장 자격으로 여시는 국제 선원 일요 법회에 나간 지도 4년이 되어 가지만,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공안 인터뷰를 신청하지 않았었다. 처음 한 동안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서였고, 그 후에는 아마도 나의 참선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현각 스님과 동안거를 같이 하고 있는 이참에 한 번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번쩍 손을 들어 신청을 하였다. 신청자는 나를 포함하여 몇 명이 더 있었다. 입승 스님이 선방에서 참선하고 있는 인터뷰 신청자들을 두어 명씩 인솔해 내려가셨다. 우리는 어린이 방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 때, 입승 스님이 선원장 스님께 가서는 공손히 1배 만 하고, 인터뷰가 끝나면 얌전히 뒷걸음으로 물러나서 문을 열고 나오라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나는 그때 생각하였다...
'아, 현각 스님은 한국 사람인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의 보물 같은 전통을 배워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는 구나.'하고. 현각 스님은 스승인 숭산 스님께 어른 앞에서는 공손히 절하고, 반드시 뒷걸음으로 물러 나와야 한다는 것을 배우셨고, 그것을 국제 선원에서 고스란히 물려받아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께 귀가 따갑도록 듣고, 많이 실행하였던 것이지만, 수 십 년 동안 수많은 외국 문명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다 놓아버렸었다. 그것은 하찮은 것, 그것은 별 것 아닌 것, 그것은 잊어버려도 그만인 것... 으로 젖혀놓았었다.
물질문명, 과학 문명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소박하게 보이지만 품위 있는 정신문명의 산물들을 다 팽개쳐 버린 우리의 현실이 거기에서 보였다.
우리가 낡은 한옥 집 광에 곰팡내 나게 쳐 박아 두었던 것들을 미국 스님과 리투아니아 스님을 위시한 외국 스님들이 꺼내어 소중히 쓰고 계시는 현장을 나는 본 것이었다.
크게 보면, 이런 것이 화계사 국제선원을 포함한 우리나라 선방과 사찰에서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멋진 전통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한국 불교가 참으로 소중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 절 건축물이 수려하고, 절터가 세워진 곳의 경관이 뛰어나며, 경전의 내용과 불교 의식이 훌륭할 뿐더러, 수행을 치열하게 하시는 스님들이 존재하신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위대함이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위 사람을 존중하며, 나의 몸가짐을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하는 것- 이것은 21세기의 한국이 많이 잊어버렸으나, 절 살림에서는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전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사찰들은 한국 불교뿐 아니라, 한국 전통을 외로이, 그러나 꿋꿋하게 지켜오고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 이쯤 해서, 다시 화계사 어린이 방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사실 나는 그 날 새벽 예불 할 때부터 왠지 모를 눈물이 계속 나왔었다.
108배 할 때도, 예불할 때도, 참선할 때도, 다 함께 조사당 참배할 때도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마음이 전혀 슬프지 않았기 때문에 울었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다. 오히려 마음이 넘치도록 행복해서 눈물이 흘러내린 것 같다.
그래서 그 날 인터뷰를 앞두고는 ‘현각 스님 앞에서 울지만 않으면 오늘 인터뷰는 성공한 것이다.’라고 내심 다짐을 하였던 터...
드디어 현각 스님이 계신 방에 들어갔다.
두 사람 마주 앉고 나면 그저 약간의 공간이 더 남을 정도의 손바닥만큼 작은 방이었다.
그런데...
현각 스님과 함께 나의 참선 자세에 대해, 화두에 대해 한국말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약간 긴장한 상태긴 하였지만, 아차차!…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전혀 울 만한 이유가 없는 담담한 이야기를 하던 차에 그렇게 되어 당황스러웠다. 급기야 나는 현각스님께 “죄송합니다.” 하였고, 현각 스님은 내게 부드러운 말투로 “괜찮습니다.”하셨다. 현각 스님이 다시 “보살님이 국제 선원에서 제 법문 열심히 듣고 계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인연입니다.”하셨다. 나는 “스님께 고마운 마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결국에는 현각 스님이 인자하고 환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셨고, 나도 눈물 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방을 나왔다.
나이로는 나보다 훨씬 젊으신 스님이지만,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 대하듯 따사롭게 맞아주시고 보내 주셨다.
... 나는 평소에 현각 스님, 그리고 헝가리의 청안 스님과 전생의 어느 시점인가에 공부를 같이 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내 착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특히 그 때문에 그렇게 눈물이 나지 않았나 싶다. 그간 수 년 동안 국제 선원에서 현각 스님 법문을 들었지만, 그렇게 1대 1로 마주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 아마도 내 속의 참 성품이 말이 끊어진 가운데 그렇듯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나 싶다...
'겁과 겁을 돌고 돌아서 이제야 스님과 마주 앉았습니다.'라고!
결제 기간 동안, 나는 하루 중 새벽 시간이 제일 좋았다.
사실 동안거 시작하기 전에는, 수 년 동안 다닌 화계사에서 내가 참선의 깊이를 더하는 외에 화계사 자체를 새롭게 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심지어, 나는 그 동안 몇 군데 지방의 전통 사찰에서 자원 봉사하며 장기 체류한 적이 있는데, '그런 사찰에 비해 서울에 위치한 절,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절인 화계사에서 장기 체류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라고 까지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내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나는 나의 동안거 기간 동안 2층, 또는 대중 방 쪽의 마당에서 보면 지하 1층의 방에서 잤는데, 새벽 3시에 작은 종을 울리며 지나가는 스님의 도량 석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세수하고, 다른 도반, 스님들과 함께 선방에 모여서 108배를 하였다.
그것이 끝나면 30~40분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이 때 나는 선방 옆 다각 실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108배후의 커피가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모른다. 탁자 주위에는 도반 몇 명이 각자 나름대로 마실 것을 들고 앉아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 날도 삼각산 쪽으로 난 다각 실 창문을 등진 채 커피를 앞에 놓고 마시고 있는데, 마침 다각 실 방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리로 보이는 선방에는 절전을 위해 큰 조명은 다 꺼 놓은 채, 노란 색 전구들만이 저 반대 편 문 쪽 끝까지 선방을 가로 지르며 쭉 켜있었다.
마침 반대 편 방문도 조금 열려 있었다...
아!
그때의 선방은 내가 일요일 낮에 와서 참선하고, 사람들 가득한 가운데 법문 듣던 그 선방이 아니었다.
그 날 그 새벽, 나는 그 다각 실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을 보았다. 어슴푸레한 선방을 가로질러 반대 편 방문을 넘어, 바깥쪽으로 난 창문에 이르기까지, 나는 영원으로 향하는 길을 보았다. 그 창문을 넘어 저쪽 위 편 고봉스님 탑을 지나면 곧장 영원으로 향하는 길로 내쳐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넋이 나간 채, 그날 새벽 그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계사 안에 화계사를 훌쩍 뛰어넘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이참에 다각 실 얘기를 좀 더 해 본다.
다각 실은 스님들을 포함한 안거 대중들에게 아주 소중한 만남의 장소이자, 휴식의 장소였다.
참선 대중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거의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수행하였지만, 참선, 예불 시간이 대부분이라, 공양 간에서 밥 먹을 때 가끔 대화를 나누는 외에는 거의 따로 얘기할 시간이 없다. 헌데, 다각 실에서는 묵언이 원칙이다(물론 우리의 동안거 전 기간이 원칙적으로 묵언을 전제로 하기는 하였지만…). 다각 실에 앉아 음료나 간단한 참을 먹을 때, 우리는 일단 묵언을 한다. 그리고 꼭 필요한 사항이 있을 때는 몸짓으로 해결한다. 도반들, 스님들이 서로 대화하려면 워낙 여러 언어를 필요로 하므로, 어떤 때는 이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몸짓, 손짓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동안거 지내는 동안 나의 몸짓 언어는 괄목할 만큼 늘기도 하였다.
허나, 묵언 원칙에도 불구하고, 워낙 다양한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 궁금한 것도 많아서, 그 중의 누군가가 묵언을 깨고, 그러다 보면 차츰 이 사람 저 사람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대화에 열중하게 되면 자연 말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고, 이럴 땐 영락없이 다각 실 안 쪽으로 난 방을 개인 방으로 사용하시는 입승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스님은 언제 나오셨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나오셔서 안 그래도 큰 눈을 짐짓 더 동그랗고 크게 부라리시고는, 떠드는 사람에게 손가락, 또는 주먹으로 과장된 위협을 하신다. 가끔 그 주먹으로 누군가에게 꿀밤을 먹이기도 하셨지만, 스님의 위협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나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선방 다각실의 규칙을 준수하라고 으름장 한 번 놓으시는 거라는 걸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다가, 리투아니아에서도 알아주는 판토마임의 고수이셨던 보행스님의 장난기 있는 얼굴이 누군가를 겁먹게 하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라고 했던가?
다각 실에서 입승 스님이 나오실 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소곤소곤 나누는 대화 몇 마디는 정말 더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차, 커피, 주스 등의 다양한 음료가 갖추어진 다각 실에는 이따금 아래 층 공양간에서 큰 접시 가득히 푸짐한 떡이 올라왔고, 설날 같은 특별한 날에는 솜씨 좋은 보살님이 만들어 오신 떡, 한과 류 등을 푸짐하게 맛볼 수 있기도 하였다. 보통 이런 참은 3시간에 걸친 오후 참선이 끝나고, 선방 청소를 마칠 쯤 해서 원주 스님인 폴란드 출신 관미 스님이, 혹은 헝가리 출신 조우 행자님이 가져다 주셨다.
그 시각이면, 아직 저녁 예불과 참선이 남아있기는 해도, 이른 새벽부터 이어진 빡빡한 일정이 상당 부분 소화된 시점이다. 더욱이, 청소 울력으로 좀 지치고 배고픈 데다, 우리 힘으로 깨끗하게 청소한 너른 선방을 바라보며 뿌듯한 느낌까지 더하여, 이때의 참은 정말 맛이 좋았다. 모두들 선방 청소를 단숨에 끝낸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또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기분 좋게 맛있게 참을 나눠 먹었다.
이때쯤에는 입승 스님의 묵언 원칙도 조금 말랑말랑하게 적용되기 마련이었고...
바로 이 청소 울력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자.
내가 처음 도착한 날은 일요 법문이 있던 날이었다. 그래서 법문 후 바로 저녁 공양 시간에 맞춰 내려가느라, 청소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참선이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입승 스님의 죽비3)가 쳐지자, 갑자기 모두들 일어나더니, 벽장에서 청소기, 빗자루, 걸레 등을 꺼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새벽부터 그때까지 청소 만 계속한 사람들처럼 각자 자기 맡은 곳의 청소를 하기 시작하였다. 참선의 고요한 놓임에서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못했던 나는 갑자기 좌복4)에서 일어나 말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반들을 바라보며 한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조차 이해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마치 개미 병정 떼처럼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는, 20~30분 만에 말끔하게 상황을 종료시켰다. 물론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한 일이기는 하지만, 선방, 다각 실, 심지어 아래 층 층계까지 비질, 걸레질이 모두 마쳐 진 데다, 청소에 사용한 걸레들까지 깨끗이 빨아 다용도실에 널어놓은 깨끗한 광경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뭉쳐서 발휘하는 힘의 위력!
더구나 우리는 평시 거의 묵언 속에 청소하기 때문에 누가 어느 구역을 맡자는 의논을 하는 적도 거의 없지만,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장소를 잘도 찾아가서 일을 깔끔히 끝내 버리곤 했다.
국제 선원에는 선원 스님, 입승 스님 외에도 몇 분의 스님이 더 계셨다.
러시아 출신의 일교 스님과 혜행 스님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누비 두루마기가 아주 잘 어울리는 젊은 비구 스님들이었다.
이 스님들이 새벽 예불 시간에 교대로 종두5)를 맡으셨는데, 그 종의 울림은 마룻바닥을 궁글게 훑고 지나 와 나의 온 몸으로 전해졌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나를 태고의 어느 멀고 먼 시점으로 데려갔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종의 울림을 몸으로 느끼며, 나는 두 젊은 스님들의 뜨거운 수행의 깊이가 그 종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앞서 잠깐 언급한 폴란드 출신의 젊은 비구니 스님인 관미 스님이 계셨다.
그 스님은 평소 늘 시선을 아래로 깔고 조용히 오가곤 하셨는데, 듣자 하니 내가 도착하기 전 부터 시작하여 한 달 예정의 묵언을 하시는 중이라 하였다. 그런데, 스님을 알게 될 수록 나는 스님이 아주 독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의 몸속에는 당신 특유의 활활발발한 리듬이 있었다.
실은 평소 국제 선원에서 스님이 예불 드리는 모습, 그림 같이 조용히 오가시는 모습을 뵈면서는 '지나치리만치 철저하게 수행을 하시는 분이로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떠냐 하면, 스님에게서는 인간의 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고행을 하는 바로크 조각상 같다는 인상만을 받았던 것이다(나중에 스님과 조금 친해지고서 이런 말씀을 드리니까 명랑하게 "하하하!" 웃어 넘기셨다).
그러나, 지근 거리에서 같이 생활하며 수행하다 보니, 그 분은 '너무나도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셨다. 참을 드실 때도 다각 실 대중이 모두 다 먹게끔 권하고 또 권하셨는데, 묵언 중에도 온갖 몸짓, 손짓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그런 의사를 적극적으로 알리셨다(고슴도치 같이 생긴데다가 향도 썩 좋지 않은 두리안이라는 이국 과일이 그렇게 즙이 흘러넘치는 맛있는 과일이라는 것도 스님 덕택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분은 그런 몸동작, 손동작을 할 때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리듬을 타셨다. '쿵짝 쿵짝' 혹은 ‘쿵따닥 쿵따닥’… 이런 식으로… 심지어는 간단한 샐러드를 만드실 때에도, 그것을 다 만들고 나서 드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온 몸이 이 비슷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나중에 관미 스님은 내게 자신이 '한국 절에 아주 강력한 업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쨌든, '고행을 하는 조각상'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리듬을 타며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놀이 중, 함께 어울려 손을 잡고 ‘토끼 같이 깡충깡충 뛰면서 강강수월래를 즐기시던 스님의 모습’(이것은 어떤 보살님의 표현)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결제를 같이 한 도반들 중에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들도 있었다.
숭산 스님이 살아 계실 때 화계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지만 환속한 후, 매 해 겨울마다 국제 선원에 돌아 와서 이번이 9안거 째인 미국 거사님도 계셨고, 오래 전에 태국에서 몇 년간 스님을 하셨던 캐나다 출신 거사님도 계셨다.
그런가 하면, 국제 선원에 러시아 쪽 스님이 많이 계셔서 그런지, 러시아 도반들도 몇 있었다. 이들 중에는 덩치가 –조금 과장하여- 우랄산맥만한 사람도 있었고, 호리호리한 사람도 있었지만, 포행 시의 걸음걸이를 보면, 이쪽저쪽 모두에게서 러시아 대륙의 호쾌하고 활달한 기백이 넘쳐흘러, 다른 도반들의 걸음까지 덩달아 경쾌해지면서 기운이 나곤 하였다(포행 시에는 앞 사람 발치만 쳐다보면서 자신의 화두를 챙기고 걸어야 하는데, 고백하건대, 나는 이 점을 잘 지키지는 못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출신 도반 하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냈지만, 언제나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우리 결제 대중의 한 축을 든든히 받쳐주었다.
반면, 한국 도반들은 다 20대의 애기 보살님들이었다.
그 중 한 젊은이는 한 살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이번 결제에 참여하여 내친 김에 계룡산 무상사에서 수계까지 받은 인물... 그는 나이답지 않게 몸가짐이 무게 있는데다가 영어도 잘 하여, 공식적인 일에서는 우리의 통역을 도맡았다.
다른 젊은이는 참선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라 하였는데, 앉음새가 나보다도 더 단단함은 물론, 참선에 필요한 인내까지 겸비하였었다. 그는 품성이 맑고, 성격도 좋은데다, 참선을 열심히 하여, 여러 가지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도반이었다.
그리고 또 한 젊은이는 마지막 며칠 동안만 우리와 함께 하였다. 그는 미국 보스턴에 가서 일 년 간 공부를 한 국제 정치학도로, 영어도 잘 하고, 늘 웃는 얼굴에 붙임성이 있어, 정월 대보름 놀이 때 우리와 정말 신나게 어울려 놀았었다.
이 밖에 각자 맡은 곳의 소임이 있어 우리와 짧은 시간 밖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스님들이 여러 분 계셨다.
그리고 절에서 기거하지는 않았지만, 시간대 별로 선원에 올라와 우리와 같이 수행하시고, 여러 면에서 우리를 외호해주시던 도반들 –주로 보살님들-이 많이 있었다.
숭산 스님 말씀대로 "한 함지박에서 서로 부비 대며 흙을 털어내는 감자들처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의지하며 서로를 도와주며 각자의 업의 먼지를 털어내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는 아무래도 절에서 살면서 결제를 같이 했던 도반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삼시 세끼 같이 먹고,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수행하고, 같이 울력하고, 해제 즈음하여 도봉산 망월사로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행을 함께 했던 길동무들… 그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거의 피를 나눈 혈육 같은 연대 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우리 모두가 그 때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서로의 수행을 도와줄 수 있는 인연이 되었음을 진정 감사드린다. 따로 있으면 망상과 아집에 흔들리며 수없이 어리석은 존재가 되기도 하는 내가 도반들과 함으로써 수행의 집 한 귀퉁이를 지탱하는 (비전문) 수행자가 될 수 있었음에 진정 고마운 마음이다.
해제 즈음...
현각 스님 주관 하에 스님들을 포함하여 결제에 참여했던 대중들이 모두 선방에 모여 큰 타원형 원을 그리며 앉은 적이 있다.
선원장 스님은 우리에게 간단히 한 마디씩 마무리 의견을 말하라 하셨다.
빙 돌아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말하였다.
''I have had 3 weeks winter retreat.
It was a tremendous thing for me.
Thanks to everyone of you.''
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
"한국말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3주 동안의 동안거를 하였습니다.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내 느낌을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현각 스님, 보행 스님을 위시하여 국제선원의 모든 스님들은 철저한 수행자들이셨고, 그 분들, 도반들과 그 고요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행복감을 나는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수심修心
*각주
1)절 안의 규칙이나 대중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맡은 직책.(다음 한국어 사전)
2)원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힘을 함쳐 일한다는 뜻으로 운력雲力이라고 하다가, 자연스럽게 자음동화가 이루어지며, '울력'이 되었다 한다.
울력은 사찰에서 뿐 아니라, 우리네 시골에서 전통적으로 여럿이 일손을 도와 일하는 것을 지칭했다고 한다.
3)어른 팔뚝 길이 정도의 대나무로, 한 쪽 끝 1/3 정도는 두 갈래로 잘라져 있다.
이 경우처럼, 참선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반대쪽 손바닥을 친다.
참선 중 조는 대중의 어깨를 가볍게 쳐서, 졸음을 쫓아주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4)방석을 일컫는데, 사찰에서 쓰는 좌복은 대체적으로 방석보다 더 크고 길고 푹신하다.
5)鐘頭. 절에서 종 또는 북을 치는 소임을 맡은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