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벅차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
-숭산 스님의 다비식에 다녀와서-
불자가 되고 나서 나는 ‘언젠가는 다비식1)에 한 번 참석해 보고 싶다.’하는 염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늦가을의 어느 날, 숭산 스님이 열반하셨다는 뉴스에 접하였다.
화계사에 다니며 스님을 먼 발치서 두 어 번 뵙기는 하였으되, 아직은 직접 법문을 듣는 기쁨조차 누리지 못 하였는데…
이제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Mieux vaut tard que jamais(늦었더라도 아예 하지 않음보다 낫다.).'
스님 다비식에 가, 흰 국화 한 송이 올리면서 삼 배를 드리며, 스님께로 향하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남아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2004년 12월 4일 토요일.
새벽 3시 반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석수 역에서 첫 전철을 탔다.
빗방울이 뚝뚝 듣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수원 역에서 삽교 행 첫 기차로 갈아 탔다.
가을걷이가 끝난 정갈한 논밭에 간밤에 무서리가 내려 있었다.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삽교 역에 내려 버스를 탄 나는 드디어 수덕사에 도착하였다.
일주문부터 ‘나무아미타불’ 독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경내 곳곳에 수 없이 많은 조화弔花가 늘어 서 있었다.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수 천 명의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들어 있었건만, 행사의 절차 하나 하나가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고 차분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덕숭산 아래 자락을 굽어보니, 뽀얀 안개가 서린 가을 비가 산의 신비한 기운을 더해주고 있었다.
분향소
신도님들과 함께 국화 한 송이 헌화하고, 큰 스님 영정에 3배 한 후, 한 쪽 벽 거의 전부를 환하게 메우고 있는 숭산 스님의 제자들과 맞절을 하였다.
몇 분의 한국 제자 분들을 포함한 세계 각국 출신 스님들의 당당하고, 훤칠한 모습을 뵈며, 큰 스님 이후의 한국 불교가 더욱 더 탄탄하게 뻗어 가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지장전
대웅전을 거쳐 지장전에 들어갔다.
참회 진언 ‘옴 살바 못쟈 모지 사다야 사바하’를 읊으며 108배를 올렸다.
겉옷을 모두 벗은 후 반 팔 티 셔츠 차림이었는데도, 땀이 비 오듯 흐르며, 머리가 홈빡 젖어버렸다.
밖에는 늦가을 찬 비까지 내리고 있는데, 마치 1000배라도 한 듯 어찌 이리 땀 범벅이 된단 말인가?
어쨌든, 이렇듯 참회의 절을 하면서, 내가 짓는 죄, 그리고 혹여 남들이 짓고 있을 지도 모르는 죄가 다 소멸되어 큰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 지시기를 빌었다.
108배를 마친 후, 나는 지장전에서 나왔다.
마당에 선 나는 우산을 든 채, 의식이 한창 준비되고 있는 영결식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웬 거사님이 "비옷 없으세요?" 물으셨다.
없다고 했더니, 바지 뒤 주머니에서 새 비 옷 한 벌을 꺼내서 내게 건네었다.
순간 당황하여, "거사님 쓰실 것 아니에요?" 했더니, "아니요." 하며 미소를 띠셨다.
마침, 문상객이 워낙 많아, 우산끼리 부딪치며 서로에게 사소하게나마 피해를 주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터였다.
나는 아무 말 덧붙이지 않고, "고맙습니다." 하며 그분이 건네 준 비옷을 받아 입었다.
얼떨결에 받아 입은 비옷은 비를 피하게 하는 동시에 바람까지 막아줌으로써, 덕숭산 늦가을 찬비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 고마운 비옷을 입고 선 나는 ‘저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혹, 그 자리에 서서 뒤 주머니에 비옷을 계속 채워 넣으며, 오고 가는 비옷 준비 못한 중생에게 보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큰 스님이 이승을 떠나 대자유인으로 거듭 나시는 이 날, 나는 따뜻한 마음의 선물 하나를 받았다.
영결식
조계종 원로 스님들을 위시하여, 이 나라 고승 대덕 스님들이 모두 모이신 듯하다.
나는 그대로 서서 그 분들의 추모사를 들었다.
문상 온 신도들 뒤에서 비를 맞으며 목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이어져 나온 ‘숭산 큰 스님의 육성 녹음 법문’ 몇 마디…
인상 깊었다.
연화대로 향하는 길
큰 스님의 영정 사진과 꽃 상여가 절에서 나가는 모습을 맨 뒤에서라도 지켜 보고자 나는 연화대로 향하는 길 쪽으로 나가 섰다.
각국에서 온 신도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쓰인 만장을 들고 내 앞에 도열해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각국어로 쓰여진 만장들을 흥미 있게 구경하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몇 겹의 만장 행렬이 다 쓸리듯 아래로 내려가 버리고, 갑자기 앞이 뻥 뚫렸다!
그리고 그 때, 스님의 영정을 든 미국 출신 무량 스님과 대성 스님이 지나가시고, 뒤를 이어 흰 장갑을 낀 십 여 명의 운구 담당 스님들의 팔에 들린 큰 스님의 꽃 상여가 지나갔다.
스님의 자그마한 관은 온통 흰 종이 꽃으로 장엄 되어 있었고, 상여에는 맑고 어여쁜 색 구슬 몇 줄이 매어져 흔들렸다.
장례 행렬 맨 뒤로 큰 스님의 다국적 제자 스님들이 지나가셨다.
이렇듯 나는 눈 앞에 거칠 것 하나 없이 모든 소중한 광경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큰 스님 생전에는 가까이 뵐 기회가 없었는데, 다비식 날, 스님의 존재를 바로 코 앞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 못했다.
아직은 따스한 큰 스님의 온기가 내게 전해지는 듯, 수덕사 마당 공기가 훈훈하게 느껴 졌다.
다비식장
스님의 법구 위로 마른 솔가지들이 높이 높이 쌓이더니, 그 위에 기름이 뿌려 졌다.
그리고 나서, 모여 계신 큰 스님들께 기름 적신 솜 방망이가 전해졌다.
드디어, ‘거화炬火!’ 소리와 함께 솔가지에 불이 당겨졌다.
순식간에 불꽃 구름은 하늘 끝까지 솟아올랐다.
이보다 조금 전이던가, 이 때 쯤이던가…
여기저기서 "스님! 불 들어갑니다. 빨리 나오세요!"라고 힘껏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는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의 반야심경 말씀도 있건만…
여태까지 다비식은 근엄한 줄로만 알았던 터였다.
헌데, 이렇듯 친밀하고도 인간적인 말씀을 사자死者에게 들려 주는 전통이 있었다니!
진정 우리의 불교는 민중의 마음을 움직일 따뜻하고도 인본적인 요소들을 무한히 가지고 있는 가르침이 아닌가?...
나는 한 시간 여 타닥타닥 타는 불꽃을 고요히 바라보다가 다비식장을 떠나왔다.
생전의 큰 스님과 가까웠던 분들이 스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오붓하게 보내시기를 염원하며…
오는 것과 가는 것
있는 것과 떠나는 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태어남과 죽음
간직함과 비움
가진 자와 손이 빈 자…
생전에 전 세계를 발로 누비시며, 그토록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하신 큰 스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면, 그 큰 공덕과 원願으로 얼마나 더 멋진 일들을 이루어내실 것인가?
큰 스님이 떠나가시니, 하늘도 땅도 서러우셨던가?
하루 종일 주룩주룩 비가 내려, 절 마당과 다비 장 가는 길, 연화대의 땅은 온통 진흙 탕 길이었고, 상주와 문상객들의 옷 자락은 흙, 비 범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다비식에 참석한 모두의 마음 속에는 어떤 큰 비에도 젖지 않고, 어떤 큰 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만큼 뜨겁고 밝은 불길 하나가 조용히 타고 있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수심修心
♣각주:
1)다비식茶毘式: 죽은 사람의 몸을 불태워 없애는 불교식 화장 의식.
-----------------------------------------------------------------------------------
♣사진 제목:
<월정사 서별당 대나무 울타리 뒤에서 바라 본 구층 석탑>
♣사진 설명:
2008년 봄 월정사에서 장기 체류할 때 찍어 놓은 사진.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은 국보 제 48호로,
고려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다.
생전의 숭산스님은 수십 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니시며, 부처님 제자들을 키우셨다고 한다,
숭산 스님이 생전에 탑의 기초를 놓으셨다 하자.
그렇다면, 큰 스님 가신 이후, 지구촌 곳곳에 퍼져 있는 제자 스님들은 은사 스님이 탄탄하게 다져 놓으신 탑의 기반 위에 아름답고도 숭고한 탑을 서두름 없이 한 층 한 층 차분히 쌓아 올리시는 중이다.
석공의 숫자 비록 미미하나, 언젠가 완성 될 탑의 고아한 자태를 그 무엇에 비길까?
'부처님 제자로 거듭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01년 여름, 부처님을 사랑하게 되다 (0) | 2013.04.12 |
|---|---|
| 해인 범종 앞에서 보낸 잊을 수 없는 순간들 (0) | 2013.04.10 |
| 화계사 국제선원 동안거 수행기 (0) | 2013.04.09 |
| 불일암 참선 (0) | 2013.04.09 |
| 내 블로그 문을 열다... (0) | 2013.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