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각 나무 의자
그리고
콸콸 흐르는 계곡물 소리
내게 조계산 송광사 계곡의 청량각에 어린 추억은 참으로 많다.
우선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거의 매해 여름 내가 송광사에 내려갈 때마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아름다운 계곡 길을 걷다가 청량각에 이르렀을 때이다.
청량각에 도착하면 나는 우선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청량각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잠시 앉아 한숨 돌리는 시간을 갖는다.
땀을 닦으며, 시원하게 콸콸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나는 그리웠던 송광사에 돌아와 있음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러면서, 경기도 용인 집에서 여기 도착할 때까지 맡았던 공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다.
바로 이 지점이 내게는 속세와 스님들 수행 영역을 가르는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왔지만, 일주문에 다다르려면 아직도 10 여분 정도 더 남은 바로 그 부분쯤이...
그러면서 마음이 설렌다.
이번에는 송광사에서 또 어떤 좋은 경험을 하게 될까 하는 생각에...
청량각淸凉閣이라는 누각 이름 그대로 청량한 물바람 맞으며, 속세에서 번잡스러웠던 마음은 계곡물에 흘려보내고, 마음 어느 한 구석도 막힌 곳 없이 시원하게 툭 트여지는 곳이 다름 아닌 이곳이다.
위 사진에 보면 누각 긴 의자 위에 긴 난간이 올려져있다.
헌데, 이 난간 부분은 몇 년 전까지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내게는 이에 얽힌 작은 기억이 있기에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
몇 년 전, 여름 수련법회 자원 봉사 할 때였다.
아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수련법회 한 차수가 끝나고 다음 차수가 시작되기 전의 하루, 이틀 여유로운 날들 중이었던 것 같다. 나는 모처럼의 자유 시간을 대중방(큰 방)에 박혀 보내기 싫어 포행도 할 겸, 혼자서 계곡 길을 내려갔다.
계곡 길을 걷다가 청량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 밀린 기록을 수첩에 적고 있었다. 그런데, 그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는지 아마도 깜빡 졸고 있었나보다...
이때 저쪽 황토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던 어떤 거사님이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보살님!
거기 앉아서 졸면 안 됩니다.
큰 일 나요!"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사진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계곡물은 누각 수 미터 아래를 흐르고 있다. 그러니, 난간이 전혀 없는 의자에서 맥없이 조느라 자칫 상체가 기우뚱할 경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우려들이 쌓이며 그 후에 의자 난간이 새로 설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청량각을 포함한 이 계곡에 얽힌 또 다른 강한 추억은 바로 깜깜한 밤에 초등학생 수련생들과 함께 한 귀신 놀이이다.
몇 년 전까지는 여름 수련법회 말미에 초등학생들을 위한 2박 3일의 수련회가 있었다. 나는 그 수련법회에도 몇 번 자원봉사자로 참가하였었다.
귀신 놀이란 말하자면 어린이들 담력을 키워주기 위한 놀이였는데, 수련회 둘째 날 저녁 공양과 예불 후에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시작되었다.
헌데, 이를 위하여 우리 자원봉사자들 입장에서는 저녁 공양이 끝나는 즉시, 단시간에 많은 작업을 서둘러 해야 했다.
우선, 귀신 놀이가 끝나고 저 아래 주차장 큰 광장에서 있을 캠프파이어 때, 지도 법사 스님들, 백 여 명의 수련생들, 그리고 우리들 20여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먹을 야식(보통 수박, 옥수수, 시원한 매실차 등)을 준비하여 차에 실어 나르는 일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체 없이 시행해야하는 일이 있었다.
즉, 저 아래 어두컴컴한 계곡 길에서 어린이들 앞에 불쑥 나타날 분장 귀신들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봉들 자신이었기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비밀한 곳(종무소 옆방)에 모여, 귀신 분장사와 귀신으로 나누는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런 후, 귀신 역할을 맡은 자봉들은 포교과장님, 스님들이 미리 준비해놓으신 소복, 가발 등을 착용한 뒤, (이 행사를 위해 우리 중 누군가가 가져온) 색조 화장품, 수채화 물감, 붓 등으로 하는 귀신 분장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여기서 다행인 점은, 남녀 중고생 자봉들이 이 귀신 역할을 "좋아라!" 자청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나머지 자봉들은 일일 분장사 역할을 맡아서, 할 수 있는 한 성심껏 귀신들 분장을 하여 주면 되었다.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귀신 역할에 잔뜩 들뜬 앳되고 귀여운 귀신 후보자들 얼굴에...
이윽고, 어둠이 짙게 내리기 시작하면...
사자루에 모여 있던 초등학생 수련생들이 한 줄에 몇 명 씩 줄을 서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히 옆 친구의 손을 잡고 "옴 마니 반메 훔"1)을 목청껏 외치며 계곡 길을 내려갔다. 이때에, 어린이 법회 담당 학인 스님들을 비롯한 여러 학인 스님들, 그리고 소임 맡으신 스님들이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을 가리지 않고, 어린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계곡 길 곳곳에 든든한 방어막을 치고 계셨음은 물론이다.
한편, 바로 그때...
나무 뒤 혹은 저 청량각 굵은 기둥 뒤 어딘가에 숨어서, 행여나 들킬세라 숨죽이며 기다리던 자봉 귀신들은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다가오는 낌새가 느껴지면, 여기저기서 불쑥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났다.
헌데, 놀랍게도 무서워 우는 어린이들보다는 귀신 앞에 당돌하게 나서서 "귀신 아니죠? 귀신 옷만 입은 것 맞죠?"하며 일일 귀신들을 머쓱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아마도 무섭게 보여야 할 귀신 분장이 너무 예쁘기만 해서 그랬는지도...?
어쨌거나...
귀신 놀이 후의 캠프파이어 때에는 귀신과 아이들, 스님들, 분장 안 한 자봉들 모두가 한데 어울려 손에 손을 잡고 신나게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며 귀신 놀이에서의 칙칙한(?) 기억들을 말끔히 다 날려버렸다. 그야말로, 산중 전통 사찰에서 보기 힘든 자유롭고 훈훈한 뒤풀이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조계산에 이렇듯 좋은 사찰이 있어, 어린 새싹들이 또래의 도반 친구들과 어울려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음에 참으로 고마운 시간들이기도 하였다.
아! 저 청량각은 그런 곳이다.
아침, 낮, 저녁으로 내게 이런저런 많은 추억을 선사한 곳이다.
-수심修心
♣♣각주:
1)"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뜻의 범어로 된 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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