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제자로 거듭나기

암클 -세종대왕과 신미대사를 위시한 제자 스님들이 글 없는 백성을 위해 피워낸 연꽃- (영화 <나랏말싸미>를 보고...)

수심修心 2019. 8. 30. 20:20






암클

-세종대왕과 신미대사를 위시한 제자 스님들이 

글 없는 백성을 위해 피워낸 한 송이 연꽃-





-영화 <나랏말싸미>를 보고...



     영화 초반에서 엄청난 흡인력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장면!

     그것은 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앳된 학조 스님이 능엄경을 산스크리트어로 암송하는 장면이다...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판을 지키고 있던 신미 스님이 선대왕의 약속이니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원판을 내달라 떼쓰는 일본 사신단 대표들에게 답하고자, 제자 스님들과 함께 일본 사신단이 머무는 한양에 올라와 답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팔만대장경 원판은 나라의 보물이므로 내줄 수 없으니 당신들 스스로 만들어 가지라고 범어(산스크리트어)에 능한 신미 스님이 범어로 설명하고, 역시 범어에 능한 일본 사신단 대표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에게도 16년이나 걸린 지난한 작업인데 하물며 일본인들에게 가능한 일이겠는가를 범어로 역설하는데...

     그 와중에서 학조 스님이 범어로 된 능엄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잿빛 승복을 입은 채, 반듯한 자세로,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범어 능엄경을 암송하는 앳된 학조 스님의 모습과 목소리는 절제된 영상미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였다. 


     영화를 보며 여러 번 감동이 밀려왔다. 

     첫째) 소헌 왕후의 제안으로 궁궐에 불려온 신미 스님이 세종 대왕에게 "굳이 왜 문자를 만들려 하십니까?" 묻자, 왕은 답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서양에서는 암흑기라 불렸던 중세 15세기에 극동의 한 나라에는, 자신의 백성들이 읽기 쉽고 쓰기 쉬운 글자롤 가짐으로써 세상의 모든 지식을 그들 것으로 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은 애민愛民 정신 가득한 군주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둘째) 세종의 간곡한 제안에, 범어를 비롯한 다국어에 능통한 신미 스님과 범어를 잘 아는 젊은 제자 스님들이 의기투합하여, 새 글자를 만드는데 모든 열정을 쏟는다. 표음 문자인 범어로 쓰인 팔만대장경에 소리글자의 비밀이 다 들어있다며...

     예를 들어, 한 스님이 우리말로 닭 우는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혹은 풀벌레 소리?) 등을 내면, 다른 스님이 그 소리를 범어로 적고...  

     그렇게, 그때까지 한자로는 결코 적을 수 없었던 우리 말, 우리 소리의 발음이 적혀지기 시작한다, 기적처럼...

     셋째) 이제 세종은 점, 선(가로 막대, 세로 막대), 면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글자롤 만들자 한다.

     또한, 밤하늘의 저 무수한 별들도 스물여덟 개 정도의 무리로 정리되는 터이니, 새로운 우리 글 역시 스물여덟자 정도로 제한하자고 한다. 글자 수가 많으면 가뜩이나 할 일 많은 백성들이 제대로 다 익히기 힘들 거라며...   

     세종 대왕과 신미 스님 팀은 이렇듯 서로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차츰차츰 새롭고 쉽고 아름다운 글의 모양을 완성해간다.  

     완성된 자음과 모음을 세로로 길게 늘어놓고 더듬더듬 읽어가다가, 한자漢字는 한 글자씩  완성된 글자여서 한 눈에 쏙 들어온다는 누군가의 말에 초성, 중성, 종성을 한데 묶어 한 글자를 완성(예: ㅇ  ㅡ  ㅁ  ㅁ  ㅔ → 음메) 하는 장면에서는 콩가루와 떡메 친 떡이 만나 인절미 되듯 참으로 신기하였다. 현대어로 얘기하면, 디자인 혁명이라고나 할까...

     수년 전 스마트 폰을 새로 장만하며, 기존의 한글 입력 방식과 다른 천지인天地人 입력 방식을 새로 경험하였을 때, 나는 거의 이 비슷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한글 보유 민족이 진정 디지털 세계의 강자가 될 수밖에 없겠다는...!

     한 글자가 한 음절 안에 들어가기는 한자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자음 모음 합쳐 스물 넉자면 족한 한글과 수만 자를 외워야 의사 표시가 가능한 한자는 애시 당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다른 예를 들자면, 영어 알파벳과 특수 부호가 들어간 알파벳을 겸해 표기해야 하는 프랑스어는 풀어쓰는 글자이기에, 글자 수가 엄청 많아지지 않는가?

    

     이밖에도, 고아古雅한 영상미로 표현된 전통 사찰들, 전통 의상들, 유자(유교학자)들의 반대 때문에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글 창제 과정에서 무수히 조명되는 흰색 한지의 단순한 아름다움, 한지 위에 검은 먹을 묻힌 붓글씨로 써 진 한자, 범어, 새 글자(훈민정음)의 기품...

     그리고  세종 대왕,  소헌 왕후, 신미 스님과 그 제자 스님들 등의 탁월한 연기력!

    


     이 영화가 개봉되기 얼마 전에 나는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영화 "나랏말싸미"에 관한 특강을 들었다.

     특강의 강사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인쇄된 간경도감이 있었다는 안동 광흥사 주지 범종 스님이었다.        

     또한, 강의 말미에는 이 영화감독인 주 철현씨와 이 영화제작사 두둥 대표인 오 승현씨도 몇 마디 인사말을 하였다. 두 분은 무려 15년 전부터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영화를 준비해왔다 하였다.

     뒤늦게라도 영화를 관람하고 나니, 두 영화인의 훈민정음 사랑이 낳은 훌륭한 결과물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글 제목을 "암클"이라 붙인 이유를 설명할 차례다.

     영화 속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새 글을 만들어낸  세종 대왕과 신미 스님은 새 글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논의한다. 그러다가 세종 대왕이 "언문諺文"이라 부르자 한다. 앞으로 이 나라 백성들에게 소중하게 쓰일 글자이니, 억척스럽고 질기게 오래 가라고 오히려 낮춰보는 뜻의 "언문"이라 하자고...

      이 "언문"은 좀 더 낮춰보는 의미로 불릴 때에는 "암클"이라 불리었다 한다. 유자들의 입장에서, 부녀자(컷)들이나 읽고 쓰고 보는 천한 자라는 뜻...

     요즘의 남녀평등론에 입각해서 보면, 어불성설이라 하겠으나...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이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집현전 학자들이 후에 붙인 것이고, 오늘날의 "한글"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초에 한글 학자 주 시경 선생님이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

     여하간, 암클이라는 이름에는 노골적으로 여성비하적인 뜻이 담겨있으나, "암클"이라는 소리 자체에는 뭔가 독창적 혹은 이국적인 느낌도 들어있는 듯하다.

     한글이 창제되고 반포된 지 어언 600년 가까이 되었으니, 한국인들에게 귀한 보물인 한글을 여성들이 더 많이 읽고 쓰고 보라는 뜻의 "암클"로 받아도 되는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이것 하나만 더 언급하고 마치고자 한다.

     영화에서 15세기 조선과 21세기 한국을 한 방에 연결시켜주는 에피소드 하나!


     한글 창제단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궁에서 살며 연구하던 앳된 학조 스님은 이 일 저 일로 많이 만나게 되는 어여쁘고 젊은 마마님인 이 진아 마마님에게 흠모의 정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다 어찌어찌하여, 신미 스님을 비롯한 새 글 창제 연구단 일행이 속리산 복천사로 내려가 연구를 이어가게 되는데...  

      어느 날, 복천사 절 마당을 쓸던 학조 스님은 빗자루로 이렇게 쓴다.

     "ㅂㄱ ㅅ ㄷ"

     헌데, 같이  궁에 들어가서 살다가 나온 사형師兄 스님이 지나가다 우연히 초성으로 작성된 이 문장을 보았다!

     젊은 사제師弟 스님의 속마음을 짐작한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놀린다.

     "보고 싶다!"

     이에, 몰래 간직했던 속마음을 사형 스님에게 들켰다 싶은 학조 스님은 펄쩍 뛰며 우긴다.

     "'보기 싫다. '거든요!"

     ...


    -수심修心 -





♣사진 설명:

  몇 주 전, 강남 봉은사 마당에서 열렸던 <연꽃 축제>에서 백련을 찍었다.

  그날은 마침 한 달에 한 번 있는 참선 철야정진에 참석하고자, 저녁 8시 경에 도착하였다.

  일주문 안에 들어서면서 바로 찍었는데, 해가 어느 정도 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라, 연꽃 모습이 더 또렷이 잡힌 듯하다. 


♣덧붙이는 말: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 작품에 역사의 빈 곳을 메우는 예술적 창작력, 예술적 상상력이 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한글은 세종 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글자이다."라는 사실은 사실 그대로 남는다.

  반면, 훈민정음 창제에 믿음이 가는 몇몇 창제설이 있다는 것도 그것대로 인정해야 할 줄 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