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조계산 송광사 공양간의 아침을 빛내주는 음식-
공양간에서 자원 봉사하면서 곁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다른 음식은 몰라도 송광사의 밥, 죽은 꼭 행자님들이 책임지고 정성껏 준비하신다.
송광사 공양간 바로 건너편에는 밥만 짓기 위해 지어놓은 작은 공간이 따로 있다.
평상시에는 이곳에 대나무 발이 내려져 있고, 발 위에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이라 쓰여 있기에, 스님들, 행자님들 외의 사람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다만, 이따금 이런저런 이유로 공양주 행자님(밥 짓기 담당 행자님) 전용 공간에 내려져있던 발이 잠깐씩 말아 올려 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여름 수련 법회 기간 중에 무쇠 솥에서 갓 지은 밥을 담은 큰 밥통들을 수련생들(혹은 경우에 따라서 자원 봉사자들이) 수련 법회 장소인 사자루로 내갈 때 같은 경우... 이때 국과 밥을 같이 내가는데, 각각 네 개의 조를 위해 마련된 네 개의 큰 통에 나뉘어 들여가게 되어 있다.
헌데, 밥 짓기 전용 공간의 부뚜막에 걸린 커다란 무쇠 가마솥 앞에서 맵싸한 장작 연기 아랑곳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온 정성을 다해 집중해서 밥을 짓는 공양주 행자님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그 모습을 부뚜막 공간 밖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물론, 무쇠 솥에서 대량으로 지은 밥이라 집에서 먹는 밥맛보다 월등히 좋겠지만, 밥 짓는 일을 기도 수행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기는 공양주 행자님이 지으시는 밥이기에 그 가람의 밥이 더욱 맛있는 것 같다고...
여기서 밝혀 두자면, 밥은 점심과 저녁에만 나온다.
대개의 전통 사찰 아침 공양이 그러하듯 송광사에서도 아침에는 죽을 먹는다.
이유는 강원, 율원1), 선원2)에서 공부하시는 스님들이 아침에 부드러운 죽을 드셔야 속이 편안한 상태로 하루 수행을 시작할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이제부터 얘기하고자 하는 죽 역시 밥 담당 공양주 행자님들이 전담하신다.
수 년 전 송광사 공양간에서 처음으로 아침 죽 공양을 하며 그 맛에 반한 이래로 내내 나는 그 절의 다양한 죽을 많이 많이 사랑하고 있다. 흰 깨 죽, 흑임자 죽, 호두 죽, 잣 죽, 땅콩 죽, 대추 죽, 야채 죽, 고구마 죽, 옥수수 죽, 단 호박 죽, 호박 죽, 팥죽, 콩나물 죽, 누룽지 죽, 그리고 흰 죽 등... 먹고 나면 속이 편한 죽을 예전부터 좋아하기는 했지만, 죽이 그렇게 화려하고 맛난 음식이라는 것을 나는 그 절에서 처음 알았다.
더구나, 여름 날 아침에는 공양간 삼면에 있는 창들을 모두 활짝 열어 놓기에, 송광사 공양간에서는 앞 산, 옆 산으로 아침 안개 뽀얗게 올라오는 선경仙境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공양을 할 수 있다.
수련 법회 자원 봉사자들은 새벽 예불 후 공양간에서 채공조3), 간상조4) 등으로 나뉘어 각자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자원 봉사자들이 그날 아침 주어진 울력을 마치고 나면, 사자루의 수련생들 중 그 날의 공양 나르기를 담당한 십여 명이 묵언 속에 차례로 줄서서 공양간에 도착한다. 밥통과 국통은 이미 사자루로 옮겨졌으니,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조가 먹을 5~6인분 정도의 반찬 그릇들이 놓여 있는 쟁반을 들고 사자루로 돌아간다.
대략 그 시점에 공양종 담당 스님이 강원 앞에 매달려 있는 작은 종을 치신다.
그러면, 공양종을 신호로 강원과 공양간 양쪽 모두에서 공양이 시작된다(소임 맡은 스님들 몇 분을 제외한 강원, 선원, 율원 스님들 모두는 공양 시간에 공양간 옆의 강원 건물에 모여 단체로 발우 공양을 하신다). 비로소 공양간 대중에 속하는 자봉들도 공양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봉들은 기분 좋은 작은 특권(?)을 누리게 된다.
즉, 누구보다도 먼저 공양간에 들어가 공양을 들 수 있는 특권! 그것도 하루 세 끼 어느 때를 막론하고... 왜냐하면, 우리 자봉팀은 공양간에서보다 조금 먼저 시작된 사자루 수련생들의 공양이 끝나는 즉시 사자루로 가서, 수련생들이 나눠 덜고 남긴 각 조용 반찬 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공양간으로 돌아온 후, 잔반 재사용 처리, 설거지까지 정신없이 바쁜 일들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 공양 시간!
깔끔하게 음식이 준비된 뷔페식 공양간 배식대에서 죽 등을 담아가지고 자봉들 예약석이나 다름없는 공양간 저 끝, 계곡 바로 앞의 특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사방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 눈에 쏙 들어온다. 공양간 바로 옆을 흐르는 맑은 계곡 물, 계곡 위에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초록 빛 나무들, 주위 산들, 시자실, 행자실, 요사채 등 시야를 시원하게 탁 틔워주는 풍경... 여기에 덤으로, 계곡물 소리, 온갖 새들의 노래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는 화룡점정의 시간!
멋지게 그린 용 그림의 마무리로 눈을 그려 넣듯, 단단한 나무로 만든 긴 식탁에 모여 앉은 자봉 도반들과 함께 고소하고 달콤하고 맛난 죽 한 그릇을 음미하기 시작하면, 세상 그 무엇도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나는 그곳의 죽을 다 맛있게 먹지만, 특히 단 호박 죽, 호두 죽, 땅콩 죽, 흑임자 죽, 단팥 죽 등이 아침 메뉴로 나오면 너무 좋아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가 된다. 화려한 색깔, 섬세하고 고소한 맛, 각각의 죽이 지닌 독특한 향...
죽을 먹고 난 후의 즐거운 기분으로 여는 하루...
죽심으로 기운차게 여는 하루...
조계산 송광사에서 멋지게 여는 하루이다.
새벽 예불로 정신적인 힘을 받고, 아침 죽으로 몸의 힘을 채워 넣고, 그렇게 전통 사찰에서의 자봉 하루는 시작된다.
-수심修心
♣각주:
11)율원律院은 율학대학원이라고도 부른다.
4년 과정의 강원(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들 중에, 부처님이 설파하신 계율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이 이곳에 진학하신다.
2)선원禪院은 참선하는 스님(선승)들이 수행하는 공간.
4년 과정의 강원을 졸업한 스님들 중, 참선을 더 깊이 수행하고자 하는 스님들이 이곳에 이름을 올리고 공부하신다.
스님들 중에는 10여년 혹은 그 이상의 긴 기간을 전국의 제방 선원을 돌며 수행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고 한다.
앞부분에서도 이미 나온 단어지만, 이쯤에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
3)채공菜供은 사찰 공양간에서 채소 다듬기 등을 비롯, 반찬을 준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4)간상은 볼 看, 상 床을 써서 看床이라고 쓰며, 말 그대로 사찰 공양간에서 상을 보는 사람, 상차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덧붙이자면, 채공 소임을 보는 사람들이 모인 조가 채공조, 간상 소임을 보는 사람들이 모인 조가 간상조이다.
과정의 강원(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들 중에, 부처님이 설파하신 계율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이 이곳에 진학하신다.
♣사진 설명:
2008년 여름에 찍은 사진.
송광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왼 쪽 담 밑에 자리한 손바닥 화단.
화단 옆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그 계곡 위에는 우화각 다리가 수도승들의 수행 장소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마음 여유가 있는 사람의 눈에만 뜨이는 수도원 구석쟁이의 작은 화단...
이 화단을 정성껏 곱게 가꾸는 송광사 대중 중 누군가도 아침에 공양간에서 맛있는 죽 한 그릇을 공양했으리라...
그래서 더욱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이 작은 꽃들을 심고, 가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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