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하늘색 다리가 있는 가평군 풍경
-북한강 자전거 길을 걷다-
이번에는 이틀(지난 12월 중순과 1월 초)에 걸쳐 걸은 북한강 자전거 길 분량을 한꺼번에 묶어 다루고자 한다. 즉, 경춘선 대성리역부터 청평역까지의 구간(9km)과 청평역에서 가평역까지의 구간(14km)을 걸은 내용을 하나로 합쳐서 쓸 것이다. 왜냐하면, 첫 구간을 걸은 날은 청평에 볼 일이 있어서 오전 몇 시간만 걸었기 때문이다.
위에 명시했다시피, 합쳐봐야 총 23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이다.
지난 12월 중순 아침 일찍 대성리역에 내린 날은 엄청 추운 날이었다.
게다가 자전거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 걷기도 쉽지 않았다. 당연히 자전거 탄 사람이나 걷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북한강을 오른 쪽에 끼고 걷는 길이다보니, 전에 걸어본 북한강길이 거의 다 그랬듯 경치는 일품이었다.
눈 쌓인 추운 길을 묵묵히 걷노라니, 저 앞 오른 편에 사막 속의 신기루처럼 눈 덮인 청평댐이 보였다. 그냥 길 따라 걷다보니, 눈앞에 청평댐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원한다면 청평댐 쪽으로 가까이 갈 수 있었으나, 그 길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어 포기하고, 돌아가는 왼 쪽 길을 택하였다. 어차피, 북한강 자전거 길은 청평댐을 오른 쪽 앞 쪽에 버려두고, 왼 편의 조종천 둔치를 끼고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폭이 좁은 조종천 둔치를 조금 걸으니, 앞 쪽에 '낭만 가득 청평'이라는 글씨가 크게 붙어있는 청평교가 반겨주었다. 청평교 부근에는 색 색깔의 자그마한 저층 아파트들이 밀집해있어, 청평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잠시 볼 일을 보며 맛본 호반의 도시 청평은 현대화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덜 다듬어진 소도시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소도시 특유의 따뜻한 인심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일정 탓에, 그 유명한 청평 호반 쪽으로 가서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기회는 다음 언젠가로 미루어두었다.
그리고는 지난 달 초 어느 평일 아침, 춘천선 전철을 타기 위하여 상봉역에 도착하였다.
그날의 걷기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깐 내가 좋아하는 상봉역 아침 풍경에 대해 두 어 마디하고 넘어갈까 한다.
상봉역은 묘한 설렘이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 역은 용산역에서 출발한 중앙선이 팔당, 운길산, 양평 쪽으로 가는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곳이자, 대성리, 청평, 가평, 춘천 등으로 가는 춘천선 승객들이 차를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겨울이라 아직 어둑어둑한 때인 7시 전후 그곳에 내리면 예전에 교외로 가는 기차역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들고 갈 음료 박스나 먹거리 상자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서 MT에 대한 즐거운 기대로 부푼 마음에 역 분위기를 들뜬 수다로 채우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청량리-춘천을 오간다 해서 그 이름도 낭만적인 '청춘열차'라 붙였다는) 2층 준고속열차인 itx 청춘 열차에 대한 안내 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꼭 새벽 어시장이나 거대한 농수산물 시장에만 가야 생동하는 삶의 맥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픈 것이다. 서울에서 남으로, 동으로 쭉쭉 뻗어나가고 있는 교외 전철 노선의 역사 내부에서도 푸드득거리는 삶의 긍정 에너지는 얻을 수 있다.
청평역에 내리니 어느 덧 여덟 시 반 정도 되어 있었다.
역사를 빠져나가, 물어 물어 한 십 여 분 걸어 내려가니 저번 걷기 때 이미 한 번 만났던 조종천변이 나왔다. 마침 그날 청평의 조종천변에서는 송어 얼음꽃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비교적 이른 아침이라 축제 손님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다만 둔치 길 양쪽에 늘어선 임시 먹거리장과 식당, 상가 상인들만이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 맞을 채비에 분주하였다. 헌데, 그곳은 북한강 자전거 길에서는 흔치 않은 자전거, 자동차 공용 도로여서, 막상 축제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꽤 복작복작한 길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저 드문 볼거리인 조종천변의 얼음벽(얼음꽃?) 사진만 찍고는 곧바로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겨울 축제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한갓진 천변길이 나타났다.
길은 걷기 좋은데 좀 염려스러운 마음이 났던 나는 전에 그 근처 걷기길 어디선가(군청 혹은 전철 역사) 얻었던 지역 지도를 펼쳐보았다. 왜냐하면, 북한강길에는 '국토 종주 북한강 자전거 길'임을 확인시켜주는 청색 바탕의 얌전한 안내판이 요소요소에 있긴 하지만, 왠지 좀 미심쩍은 데가 있어, 북한강이 아닌 조종천을 옆에 끼고 가는 게 맞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때 마침 내 뒤 쪽에서 천천히 길을 걸어오시는 동네 노인 한 분이 있어 궁금한 사항을 여쭈어보았다. 노인은 이 길이 내가 걸으려는 그 길이 맞으며, 춘천까지 쭈욱~ 걷기 좋은 길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걷는 길 오른 편의 눈 덮인 산은 호명산이라는 보충 설명까지 친절히 덧붙이셨다.
친절한 동네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날 걸은 길은 내내 '좋은 길'이었다.
자전거 길이야 당연히 길이 좋았고, 설사 자동차, 자전거 공용 도로가 나타나도 (평일이라 그런지) 차가 별로 없어 걷는 데 지장은 없었다. 또한, 길이 좋아서 그런지 그 할아버지 말고도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몇 분씩 짝지어 길벗삼아 사이좋게 걸어 다니시는 모습이 보였다.
더욱이, 추웠던 새벽과는 달리 아홉 시 넘어서자 해가 쨍쨍 비쳐주어 상쾌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걸으며 상천역 좀 못 미친 지점에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붉고 큰 글씨로 '오마니'라고 새겨 높이 달아놓은 글판이 보였다. 다가가보니 그곳은 자전거 쉼터였는데, 바로 그 쉼터 앞 '오마니' 글판 아래에는 '오마니 고향 열차 유래비'라는 것이 있었다. 내용을 보니, 탈북자 정 성산이 2001년 7월에 쓴 시를 돌에 새긴 시비였다. "그리움이 하늘에 닿아/ 파랗게 멍든 하늘이여 [...] 오늘도/ 불효자는 속죄의 한을/ 소리쳐 외칩니다./ 용서해 주시라요 오마니!/ 살아만 계시라요/ 나의 오마니시여..."
상류에 있는 냇물이라 이름 붙여진 듯한 상천역上泉驛을 지나, 색현터널을 통과하여 마침내 가평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날 그 길에서 내가 제일 많이 본 것은 집들이었다. 물론, 반듯하고 깔끔한 전원주택들도 있었지만, 특히 초입에 걸었던 길가에는 전국 어느 곳 논둑길, 밭둑길 주변에나 있을 법한 집들- 색색깔 지붕과 개성 있는 빛깔의 벽이 있는 수수하고 작은 시골집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더 나는 거기서 가평加平의 속뜰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날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글 제목 위에 올려놓은 사진 속 풍경이었다.
가평군 자전거 쉼터 근처 제법 큰 공터의 '오마니 고향 열차 유래비'와 화합의 내용이 담긴 돌판 등을 구경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눈앞에 나타났던 자그마한 다리!
빛바랜 하늘색 다리!
다리를 건너 보고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이름도, 준공 연도도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도 성도 없는 다리였다.
하지만, 주변 풍경에 잔잔히 녹아드는 다리였다.
빛이 바랜 하늘색으로 남이 지니지 않은 매력을 발하는 다리이기도 하였다.
언젠가 수도권 외곽의 내로라하는 신도시에 산책 겸 갔다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 위에 웅장하고 거창한 느낌의 다리 여럿이 세워진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주위 풍경에 녹아들며 도시 미관을 살려주기는커녕, 도시를 쥐락펴락하는 느낌의 위압적인 다리들이었기에 그랬다.
헌데 '빛바랜 하늘색 다리'는 그렇지 않았다.
수수한 시골 풍경에 조용히 스며들어, 자신의 아름다움도 살고, 동네 외관도 빛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다리가 좋았다.
한 겨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기운을 발하던 그 다리가 그래서 좋았다.
대성리역을 지나 청평 댐을 향해 가면서 만난 눈 풍경.
눈 덮여 인적이 거의 끊어졌던 북한강 길을 걷다보니
저 멀리 오른 편에 문득 청평 댐이 나타났다.
"낭만 가득 청평"이라는 큰 글씨로 길손을 반기는 청평교와
다리 뒤 쪽에 오밀조밀 붙어있는 색 색깔 아파트들
그리고 눈 덮인 산들.
청평교 근처 조종천의 얼음꽃 축제장 풍경.
청평 얼음꽃 축제장을 벗어나 한갓지게 조금 걸으니
나무 데크교가 나타났다.
조종천을 가로질러 걸쳐진 제법 길고 아름다운 다리.
춘천 신매대교까지 43km라고 써 있었다.
청평교에서 상천역으로 향하는 중 나타난 자전거 길 초입.
근경의 연 노란색 벽에 붉은 지붕을 올린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 분위기에 흠뻑 취하게 해준 먼 데 산들...
가평군 자전거 길 주변의 시골집들.
붉은색 지붕, 초록색 지붕, 밤색 지붕...
사진 하단의 긴 수평 막대는 자전거 길 난간의 일부.
자전거 길 오른 편에 나타난 집들.
진회색 지붕, 다홍색 지붕...
자전거 길 왼 편의 검정 기와집.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검정 기와 꼭대기에 흰 글씨로 福자가 새겨져 있다.
흡사 무대 세트 같으면서도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렸다.
한가로이 걷고 싶은 자는 다 이리로 오라는 듯,
앞으로 쭉 뻗어 곧게 난 자전거 길.
자전거 길 오른 편의 이층 혹은 삼층 집.
지붕은 벽돌 색이고 태양열 주택인 듯...
붉은 글씨로 '오마니'라고 새겨, 높이 걸어놓은 글판 아래
'오마니 고향 열차 유래비'라는 시가 새겨진 돌판이 있다.
'오마니 고향 열차 유래비'가 있는 넓은 쉼터 한 구석.
의미심장한 글자를 새겨넣은 또 하나의 돌이 있다.
'화해 용서 그리고 하나'라고 새겨진 길쭉한 돌 뒤로
마침 경춘선 전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갈라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원이 담긴 이 글의 힘으로
언젠가는 한반도의 남북을 힘차게 이어주는 열차도 생겨나리라...
가평군 자전거 길 주변의 건물.
연 녹색 벽에 연 회색 지붕을 이고 있다.
-수심修心
'금수강산 누비고 다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십자가 곁 흑인 여성의 집중된 순간- 춘천 의암호반 커피집의 외벽 벽화 (0) | 2014.02.27 |
|---|---|
| 함박눈 펑펑 내리는 북한강 길을 걷다- 경기도 가평을 떠나 강원도 백양리까지 (0) | 2014.02.08 |
| 눈 호강하며 걷는 북한강 자전거길 -운길산역에서 강줄기 거슬러 동으로, 동으로... (0) | 2014.01.05 |
| 남한강 길 걸으며 쟝 쟈끄 루쏘를 생각하다 (0) | 2013.12.30 |
| 북한강 철교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비바람 휘몰아치는 남한강 길을 걷다 (0) | 2013.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