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 펑펑 내리는 북한강 길을 걷다
-경기도 가평을 떠나 강원도 백양리까지-
전 날에도 눈이 왔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을 걸은 그날 내내 눈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였다.
아니, 아예 상봉역에서 이른 아침 춘천선 전철에 오르고 나서부터 예약한 기억도 없는 눈꽃 열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이번 겨울에 북한강 길을 걷기 위해 춘천선 전철을 이미 몇 번 타 보았건만, 눈이 펑펑 내리니 풍경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경상북도 산골 중에서도 오지인 봉화 어디쯤을 달리는 것 같았다!
표정 관리 안될만큼 좋은 일이 있을 때에 불쑥 나오는 우리 말 표현- "웬 떡이야?" 바로 그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하얀 떡가루가 하늘에서 부슬부슬, 펑펑 내리던 지난 달 말 어느 평일 오전.
나는 가평역에서 백양리역까지 딱 10km를 걸었다.
하고픈 대로 하라면, 눈 속에 파묻혀,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그렇게 마냥 걷고 싶었다.
호주에서 1년 동안의 워킹 할리데이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그날 오후 비행기로 돌아오는 사랑하는 조카 딸 녀석 찐돌이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은 정말 아름답게 내리셨고, 그 눈발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오전의 너 댓 시간이 하루 종일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그 눈은 한국으로 돌아와 새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찐돌이 녀석의 앞날을 밝혀줄 상서로운 눈인 서설瑞雪 아니던가? 사방에 길이 막혀 교통 체증으로 시끌시끌한 날이었지만, 어찌어찌하여 그 눈을 즐길 수 있었을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예쁘고 고마운 눈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눈길 걸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아침 일찍이 전철 환승역인 왕십리역 편의점에서 이미 나는 그날을 웃으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로, 편의점 주인아저씨 덕분이었다.
경춘선 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중앙선 역에서는 전철 간격이 떠서 오래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해뜨기 전이라 날도 으스스 추웠다. 그래서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인스턴트 커피 봉지를 하나 샀다. 커피 드시고 가실 거냐고 물은 편의점 아저씨는 내가 산 커피 봉지를 뜯으시더니, 놀랍게도 자신의 등 뒤에 설치되어 있는 뜨거운 물 나오는 기계에서 손수 더운 물까지 부어 내주시는 것이 아닌가? 엉겁결에 커피 컵을 받아든 내가 고맙다고 하고 나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웃는 얼굴의 편의점 주인이 내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손님들 중에는 더러 더운 물을 종이컵에 붓다가 흘리시는 분도 있고, 가게도 협소하고 하여서, 웬만하면 제가 직접 타드립니다. 아 그런데 손님들 중에는 내가 부어준 물이 적으니, 많으니 하다가, 아예 마시지 않고 휑 가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별별 손님 다 있다니까요."
그 말을 웃는 얼굴, 선한 눈매로 전하는데 왠지 웃음이 나서 주인과 손이 다 같이 한 번 크게 웃었다.
단돈 700원 짜리 커피를 편의점 주인이 손수 타 주는 나라...
대한민국 국민은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이고, 앞전에 설명했다시피, 편의점 아저씨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리한 것은 맞지만... 이 나라에서는 인구 초 밀집 지역 대도시 한복판에서도 서비스를 빡빡한 계산이 아닌 느슨한 정으로 풀어버리는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
...
가평역에 내려 역사 밖으로 나가보니, 새로이 지어진 커다란 가평 역사 역시 눈을 맞고 있었다.
역사를 뒤로 하고, 눈 내리는 길을 몇 분 걸어갔다. '춘천 신매대교까지 29km'라는 길 안내 표지가 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자전거 길 바로 오른 편에 가평의 자랑 중 하나인 자라섬이 보였다. (섭섭하게도 나는 아직 참석해본 바 없으나) 매년 가을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니, 평화로운 소도시 가평에 자유로운 예술혼의 이미지까지 입혀주는 그런 섬이다.
자라섬은 사실 눈이 안 와도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물며 눈까지 홈빡 덮여버리니, 고운 꿈속에 본 예술섬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는 백양리역 앞 8km 지점에서 기나긴 다리가 하나 나타났다.
경강교京江橋였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에 놓인 다리라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한다.
확실한 도경계를 일러주는 경강교 바로 앞 지점에 작은 쉼터가 하나 있어, 그곳에 잠시 멈춰 강 쪽을 응시하였다. 저 앞에 연녹색 아치교인 경춘선 가평 철교가 크리스마스 카드 속 설경처럼 내 눈 속에 쏙 들어왔다.
헌데 길고 긴 경강교를 건너면서 문제가 생겼다.
다리 바닥에 눈이 이미 많이 쌓인 데다가 그 위로도 계속 눈이 내리고 있어, 걸음을 뗄 때마다 신발이 눈 속에 푹푹 파묻혔다가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만만치 않았고, 이렇게 더디게 거북이걸음으로 걸어가다가 어느 세월에 백양리역 코빼기라도 구경해볼까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걸으면서 요령이 생겼다. 그 요령이란 게 무엇인고 하니, 누군가가 걸어간 자국이 있을 경우, 그 발자국을 그대로만 꾹꾹 밟고 가면, 발걸음 뗄 때마다 푹 꺼졌다가 솟아오르는 과정은 거치지 않아도 좋았다는 말이다. 아쉬운대로 속도를 낼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어이쿠!
정말이지 혼자 사는 세상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눈 속을 혼자 걸어간다 하여도,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면 그만큼 힘을 덜 빼며, 힘을 아끼며 전진할 수가 있다. 생에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덕을 보며 걸어가면서, 법당에서 예불 드리며 외우던 <지심귀명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十方三世 帝網刹海 ...'
한문 실력 부족으로 자세한 뜻풀이를 할 수는 없지만, 스님들께 들은 바에 의하면, 이 구절의 큰 뜻은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서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 그렇네!
확실히 연결되어 있었네!"
하여, 비교적 어렵잖게 경강교도 건너고 나서 계속 전진하다가 백양리역 앞 7km 지점부터 백양리역 앞 1km 여를 남겨둔 지점까지는 북한강을 왼 쪽에 끼고 호젓하게 걸어가는 길을 만났다. 그 길의 오른 쪽 2~3 미터 높이 둔덕 위로는 걸어가는 내내 잊혀질만 하면 전원주택 또는 펜션 등이 나타났고... 보통의 자전거 길 정도 폭의 그 길에는 바닥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어, 그 길이 자전거 전용 도로인지, 아니면 자전거, 자동차 공용 도로인지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지만, 아주 이따금 자동차들이 나타난 걸로 보아서는 후자인 듯하였다.
헌데, 그날만큼은 예외적으로 그 길이 자전거 전용 도로가 아니고 공용 도로인 것이 반가웠다. 왜냐고 물을 것도 없이, 자동차 바퀴들이 두 줄로 꾹꾹 다져준 길을 밟고 가면 수월하게 걸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폐역인 경강역 부근의 북한강에 가로놓인 춘성 대교도 지났고, (중간에 쉴 곳도 여의치 않았지만) 쉬지 않고 걷다보니, 차도 옆 하안 기슭에 기둥 주루룩 박아 만든 나무 데크 길인 듯한 지점도 걸었다. 걸으면서 발밑이 좀 출렁출렁하는 느낌이 있어, 신발로 눈을 헤쳐 보니 바닥이 나무 데크 길이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가평역과 백양리역 중간 역인 굴봉산역은 오른 편 산 위 쪽으로 통과하게 되어있어, 일부러 그쪽으로 가지 않는 바에야 북한강 자전거 길을 따라 걷는 길손은 그 역을 만날 수 없었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다가 만난 북한강 자전거 길의 엄청난 설경...
겨울이 아니면 어찌 누리랴, 그런 풍경을...
추운 겨울을 거부하면 어찌 맞을 수 있을까, 그렇게 예외적인 눈 풍년을...
살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북한강을 보면서 포근함,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날 그 강가에 폭설에 가까운 눈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눈 덮인 가평역의 아침.
중앙선에 지어진 새 역사들은 대체로
미감보다는 기능에 역점을 둔 듯하였다.
그에 비하면, 경춘선 신 역사들은
하나하나 좀 더 개성 있게 지어진 것 같다.
눈 이불을 덮은 자라섬 캠프장.
사진 하단의 북한강 길 난간에도 눈이 쌓여,
마치 액자 속에 담긴 크리스마스 설경인 듯하다.
경강교로 한 발 내딛기 전의 쉼터.
멀리 저 앞에 가평 철교의 아치 부분이 보인다.
직접 눈으로 볼 때는 정말로 꿈을 꾸는 듯하였다.
북한강 자전거 길 왼 편의 북한강과 강 건너 산들의 실루엣.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강인지,
어디가 산인지...
자전거 길가 눈 덮인 나무들 뒤에 살짝 숨은 정자.
자전거 길가 둔덕 위의 흰 집.
자전거 길가 언덕 위에 축대를 쌓은 집.
자전거 길가 눈 덮인 나무들 뒤로 숨은 집 몇 채.
자전거 길 주변의 발코니가 있는 집에 눈 쌓인 풍경.
자전거 길 주변의 펜션 입구 돌층계에 눈이 쌓여 있다.
울타리 너머 펜션 마당에 빨간색, 초록색 파라솔과 의자들이 있다.
왼 편에는 북한강, 오른 편에는 주택 아니면 펜션들이 있던 그 길.
Beato Pension이라는 나무 간판이 반겨주는 펜션 입구의 나무-돌층계.
이 근처 펜션 촌을 지날 때 은은한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북한강 자전거 길에서 만난 곡선형의 예쁜 나무 데크 다리.
인적이 드문 데다 눈이 계속 내려 쌓여,
앞서 지나간 이의 발자국이 없다.
북한강 자전거 길의 강가 쪽에는 몇 가지 형의 난간이 있다.
강 건너편의 산 모습을 닮고 싶다는 듯...
녹색, 밤색, 흰색을 칠한 이 난간에는
눈 쌓인 모양도 산 모양과 닮은꼴이다.
그런가 하면, 고동색 계열의 이런 난간도 있다.
난간 틈 사이로 영화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눈꽃 핀 나무, 강 그리고 건너편 산...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 같은 북한강 설경.
그래서 일부러 타이틀 사진 만큼 크기를 키워 보았다.
-수심修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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