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호에서 에게 해의 물빛을 보다
-북한강 자전거길 북동쪽 끝자락을 걸었네-
지난 2월 초순.
한겨울이지만 날씨는 비교적 포근하였다.
춘천선 전철을 타고 백양리역에 하차하니, 8시 반 경...
그날도 새벽 깜깜할 때 집을 나왔는데, 백양리역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내가 역에서 마악 교통 카드를 찍고 나오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확신이 없어 개찰구 나오기가 망설여지는 듯 길을 물었다. 엘리시안 강촌 스키장 가는데, 이 역에서 내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내 수첩의 전철 지도에서 백양리(엘리시안 강촌)을 여러 번 보았으므로, 수첩을 펴서 보여주며 이 역이 맞다고 하였다. 비교적 큰 키의 두 청년 중 하나가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를 띠며 내게 고맙다고 하였다. 아주 맑고 좋은 목소리를 가진 청년이었다. 스키장 가서 즐겁게 스키 탈 생각에 목소리와 얼굴 표정이 더욱 더 생기 있고 환한 듯하였다. 이어서, 목소리 좋은 청년이 덧붙였다. 자신들의 스마트폰에 나와 있는 전철 지도에는 백양리라고만 표시되어 있노라고...
순식간에 그들의 들뜬 분위기에 약간 전염되어버린 나 역시 밝은 소리로 덧붙여주었다.
"종이로 된 전철 지도 하나 갖고 다니세요!"
겨울의 백양리역 둔치 길은 사람 하나 없이 썰렁하였고, 전날 아니면 밤사이 비가 내렸는지 살얼음이 얇게 얼어 몹시 미끄러웠다. 등산화를 신었는데도, 어느 걸음에 미끄러져 뒤로 나자빠질지 몰라서 조심스러웠다. 두껍게 얼음 언 호수나 강 위를 걷는 것보다도 사방에 살얼음 낀 보도를 걷는 것이 때로는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왼 쪽에는 얼음이 녹아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 오른 쪽에는 차도 아니면 펜션, 가게들이 있는 그런 길을 따라 걸었다. 걷는 내내, 멀리 앞 쪽에 녹색의 기나긴 강촌교가 시야에 들어왔다.
강촌 레일 파크를 지나고, 춘천 신매대교를 19.5km 앞둔 지점에서 우회로 표시가 나왔다.
그리고 그 길가 작은 공터에 가수 나 훈아의 유명한 노래 "江村에 살고 싶네" 노래비와 노래의 유래를 적어놓은 돌이 있었다.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 [...]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1965년 경, 춘천에서 서울로 가던 설강 선생이 강촌의 목가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며 쓴 글이라 하였다. 그런 글이 나올 법하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시골 마을이 강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강 자전거길은 거기서 오른 쪽으로 돌아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강촌교를 건넌 뒤, 다리 아래 둔치 길을 지나게 되어 있다. 이 구역은 내가 이제껏 걸은 북한강이나 남한강 자전거길 중에서 제일 덜 재미있는 구역이었다. 아마도, 그대로 앞으로 쭉 전진하다보면 의암댐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그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왔다!
드디어 의암댐이 나왔다. 별 재미없는 무덤덤, 시큰둥한 길을 그럭저럭 의무적으로 6km 남짓 걷다보니... 신매대교 앞 13.4km 지점이었다.
의암댐에 도착해서, 자전거길을 따라 의암호衣岩湖에 첫 발을 디디던 순간을 어찌 묘사해야 할까?
뭍이 끝나는 곳에서 바다와 맞닥뜨린 느낌이라고 할 정도로 의암호는 호수치고는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만으로도 나그네의 시선을 압도하는데, 그 거대한 호수 진입로 반대편 먼 곳에는 멋진 산들의 윤곽까지 눈에 들어왔으니...
자전거길 순환 코스가 26~27km에 이른다는 의암호는 참으로 넓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지도에서 보면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비스듬히 길게 누워있는데, 호수 가운데에 붕어섬, 중도 등이 있기는 하지만 신매대교에 도착할 때까지 호수의 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다리가 없었다. 과장 조금 보태어 거의 망망대해 바닷가를 거니는 느낌이었으니, 막상 그 길을 발로 걸어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구역에 따라서는, 나무를 더 많이 심었으면 좋겠다 싶은 곳도 있었다. 그럴 수 있다면, 걷는 이나 자전거 타는 이들에게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 줄 수 있을 뿐더러, 호수 경관도 더 수려해질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기에...
하지만, 눈이 시원해지는 참으로 멋진 호수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걷고 걸어,신매대교 5km 앞둔 지점에서 애니메이션 박물관이 나왔다.
호수 조망의 호사스런 경관에 잘 다듬어진 너른 잔디 광장을 앞마당으로 쓰는 행운을 가진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앞마당에 서서 눈앞에 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장소의 행운을 나눠받는 느낌을 준 그런 기분 좋은 곳이었다.
박물관을 뒤로 하고 조금 더 전진하다 보니, 다양한 시비詩碑들이 세워져 있는 문학 공원이 나왔고, 문학 공원에서도 지체하지 않고 계속 가다보니, 드디어 의암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수상길이 나왔다. 밑의 사진에서 보듯, 이 구역은 호숫가에 이렇다 할 길을 낼 공간이 없어, 물속에 길다란 봉을 박아 근사한 나무 데크 길로 연결해준 곳이었다. 이름하여, "물 위를 지나는 길"이다!
생각보다 꽤 길었던 물 위를 걷는 길에서는 바람을 가르며 앞 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과 이따금 스쳐 지나기도 했는데, 비록 서로 아무 말 건네지는 않았어도 환상적인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쾌감은 나눠가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더하여, 물 위를 지나는 길 바로 옆에 나무 빼곡한 바위들이 쭉 이어져 있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길에서는 숨 쉴 때마다 폐 속 깊숙이 맛있고 시원한 공기가 들락거리는 듯하였다.
그렇듯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북동쪽 끝의 신매대교를 찍었으니, 이번 겨울에 시작하여 틈틈이 두 발로 주파하였던 북한강길 여정은 다 끝낸 셈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거기서 어찌 의리 없이 아름다운 의암호를 버리랴?
신매대교를 내려와 이제껏 걸었던 호수의 반대 방향에 서니, 춘천역 5.2km 지점이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대중교통 이용자에게는 빠졌던 힘도 다시 불끈 솟아나게 하는 이정표였다. 더구나, 그 근처 자전거길에는 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어, 발걸음이 더욱 가뿐하였다.
걷는 내내 멀리 보이던 고운 자태의 분홍 아치교... 도착해서 보니, 그 정체는 소양 2교였다.
오전에 의암댐 근처에서는 약간 춥고 날도 좀 흐렸었는데, 신매대교를 건널 때쯤부터 차츰 기온이 오르고 날도 개이고 있었다. 헌데, 길다란 소양 2교를 걸어서 건너, 다리 거의 끝 지점에서 시야에 들어온 늘씬한 소양강 처녀 상 뒤의 하늘에서는 빛나는 흰 구름만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소양강 처녀 상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늠름한데다 뭔지 모를 기품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처녀 상 조각 근처에는 하늘 빛 뿐만 아니라 물빛도 확 달라져 있었다. 의암댐, 신매대교, 소양 2교를 건널 때까지의 그 하늘 빛, 그 물빛이 아니었다. 시간적으로 오후 중반에 접어들며 기온이 많이 올라서이기도 할 것이지만... 마치 섬세한 흰 레이스 커튼을 드리워놓은 듯한 호반의 백색 철제 난간과 진한 물빛, 푸르른 하늘을 바라본 순간! 내 머릿속에 20여 년 전 여름에 보름 간 여행했던 그리스 에게 해의 물빛이 잠시 떠올랐다. 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푸르고 아름다웠던 그 물빛이...
아마 나중에라도 에게 해 물빛에 젖어 살던 누군가가 춘천의 의암 호반을 거닐다가, 혹은 남해의 한려수도를 배 타고 둘러보다가 문득 자기 집 앞 바다의 그 짙푸른 물빛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하여, 그렇게 또 그리스 바다와 한반도의 호수 혹은 바다가 하나의 이미지로 겹쳐질 지도 모르겠다...
내게 순간이나마 에게 해의 물빛을 그리워하게 만든 그 호반 근처는 욘사마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 듯, 벤치 옆에 일어로 "겨울 연가(일본에서는 겨울 소나타라고 한다든가?)"라 쓰여진 글씨와 함께 잘 생긴 한국 배우 배 용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날은 그처럼 빠른 걸음으로 8시간 넘게 걸은 후에야, 춘천역으로 가서 전철을 탔다.
그리고도 남아있는 의암 호반 자전거길은 그로부터 두 주 후에 가서 마저 걸었다.
공지천길의 나무 우거진 좋은 길도 걸었고, 작가 이 외수씨의 글들을 발췌해 걸어놓은 상쾌한 길- 황금 비늘 테마 거리도 걸었으며, 호숫가 절경에 위치한 춘천 MBC 근처의 물 풍경도 감상하였다.
다만, 의암댐까지 돌아가 의암 호반 걷기의 마침표를 찍으려던 원래 계획은 포기하고, 전망 좋은 앞마당이 있는 라데나 콘도에서 나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댐까지 연결되는 자전거길은 차후 준공될 것이었기에...
한 마디로, 워낙 빼어난 경치를 많이 보여준 의암호이긴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눈이 시원해지는 이국적인 물빛을 보여준 곳을 한 곳 꼽으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에게 해의 물빛과 닮은 곳!
소양강 처녀 상이 바람에 치마 자락 휘날리며 서 있던 곳!
바로, 위 사진 속 장소 그곳이었다.
의암호 들어서자마자 만난 엄청난 호수 풍경.
사진으로는 호수의 스케일이 잘 전달되지 않는 듯...
의암호 한 쪽에 살얼음 낀 모습.
의암호 자전거길 난간에서 바라본 풍경.
의암호에서도 명당자리에 터를 잡은 애니메이션 박물관...
그 앞마당과 호수 그리고 먼 데 산.
바퀴 달린(?) 벤치들이 나란히 등을 보이고 있는 동화 같은 풍경.
박물관 앞 마당의 작은 돌 탑.
가까이 찍어서 실물 크기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실제로는 아래 사진 왼 쪽 귀퉁이에서 보듯,
아주 아담한 크기의 탑이다.
작고 아담해서 더욱 아껴주고 싶은 탑!
애니메이션 박물관 앞 마당 전경.
잘 생긴 나무들과 호수, 그리고 호수 건너편 산.
물 위로 난 길로 들어서는 진입로.
물 위 길의 휘어진 부분.
물 위 길 걷다가 잠시 뒤돌아보았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재확인하기 위하여...
의암호 클라이맥스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물 위 길.
저 앞 쪽까지 휘어져 쭉~ 이어진다.
의암댐에서 시작하여,
신매대교 찍고 돌아 내려와 걷다가 눈에 들어온 먼 데 아치교!
소양 2교였다.
이때쯤부터 조각 구름 나타나며, 날이 개이고 있다.
소양 2교를 다 건너 내려오기 직전!
저 앞에 선물처럼 소양강 처녀 상이 당당히 서 있었다.
날이 더 개이며, 구름이 걷혀가는 찰나...
다리에서 내려와 몇 걸음 더 걸어 소양강 처녀 상과 마주했다.
하늘의 구름은 거의 다 걷히고,
구름 자취만 처녀 상 뒤에 잠시 머물러 있다.
의암호 걷기 둘째 날.
긴 타원형인 의암호 남쪽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한
춘천 MBC 옆 전망대 벤치에서 내려다본 자전거 길.
지형 따라 난 자전거길이 곡선길이라,
의암호의 물도 S자로 맵시 있게 휘돌며 흐르는 듯 보인다.
-수심修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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